안 태어난 이들을 우리로 셈하는 방법
아버지 중심의 정신분석을 어머니 중심의 구도로 바꾼 대상관계 이론가 멜라니 클라인은 말-못하는 유아가 느끼는 박해 불안이나 우울을 어머니의 부분으로서의 젖가슴을 중심으로 이론화했다. 유아는 무조건적인 사랑, 충만을 욕망하지만 다른 일들도 많은 ‘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 유아는 어머니라는 하나의 전체에 대한 표상-개념이 있을 리가 없고, 그렇기에 어머니를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이라는 부분-대상으로 이원화해서 자신을 박해하는-부재하는 나쁜 젖가슴이라는 환상-망상을 창조한다. 생후 3~4개월 경의 유아가 자신의 파괴적이고 사디즘적인 공격성을 대상에게 투사해 자신이 겪는 불안과 혼란을 처리한다! 클라인은 “편집-분열적 위치(paranoid-schizoid position)”라는 용어로 이때의 유아를 (비)인간화한다. 4개월~6개월 정도에 이르면 유아는 “우울적 위치(depressive position)”에 있게 되는 데 이 위치의 유아는 이제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 둘이 아님을, 그 둘이 융합되어 있음을, 그러므로 자신에게 충족감을 주는 대상은 동시에 자신에게 좌절감을 주는 양가적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우울적 위치의 유아는 자신의 기존의 좋은 대상-이상의 상실을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즉 모든 존재는 여백으로서의 빈-공간을 갖고 있다는 우울과 슬픔, 그러나 그 사실을 감내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고통-진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클라인은 단계(phase)가 아니라 위치(position)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두 위치가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가 왔다갔다하는 두 위치임을 표식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편집-분열적 위치에서 살아가며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을, 분노와 공격성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 우울적 위치는 아주 가끔 허여되는 위치로 우리는 그곳에서 ‘주체’로서의 자신을 훼손하는 모순과 양가성, 우울과 슬픔을 겪는다.
퀴어 이론가이자 문학비평가인 이브 세즈윅은 이러한 클라인의 두 위치에 착안해서 “편집증적 읽기”와 “회복적 읽기(repararive reading)”라는 두 비평적 위치를 제안했다. 편집증적 읽기는 현실의 기저에서 작동하는 권력, 질서, 억압과 폭력의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데 주력하는 읽기 방식이다. “의미의 발견”의 해석학이자 철학적이고 목적론적인 읽기가 편집증적 읽기이다. 나쁜 것을 찾아내 몰아내고 좋은 것을 정당화·보존하려는 편집증적 읽기는 계속 대상을 바꿔가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짓는 “물화된” 읽기로 고착화되기 마련이다. 좌파적 읽기, 페미니즘적 읽기, 심지어 퀴어적 읽기가 대상에서만 다를 뿐 좋은/나쁜의 도식을 물화해서 반복한다는 점이 그것을 방증한다. 문학과 문화연구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러한 편집증적 읽기에 대한 대안으로 세즈윅이 제안하는 것이 우울적 위치에서 일어나는 회복적 읽기이다. 우리는 대체로 편집-분열적 위치에서 살고 “불안을 누그러뜨리는 성취로서의 우울적 위치에 유아나 어른은 아주 가끔, 아주 짧은 기간 거주할(inhabit) 수 있다. 그 위치에 입각해서 우리는 자신의 재원(resources)을 이용해서 살인적인 부분-대상들을 한데 모아 어떤 전체(whole), 그러나 반드시 기존의 전체와 같은 것은 아닌 전체 같은 것을 모으거나 ‘회복할(repair)’ 수 있다. 일단 자기 자신의 설명서(specifications)에 맞춰 모아놓으면 좀 더 만족스러운 대상이 동화가능한 것이자 우리에게 양분과 안락함을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뀔 수 있다. 회복적 과정을 부르는 클라인의 이름은 사랑이다.” 다시 말해서 회복적 읽기는 우울한 현실 인식을 딛고 모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현실에 주어진 재원을 모으고 회복하여 (비록 그것이 부분적이고 그마저 찰나에 그칠지라도) 더 나은 삶, 더 살만한 삶을 만들기를 요청한다. 회복적 읽기는 대상에 대한 나-주체의 무지, 혹은 대상의 모호성을 배려한다. 내게는 대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에 따라서 주체로서의 나의 지위가 불완전하기에 회복적 읽기의 맥락의 나는 나의 앎의 부분성/불완전함을 끌어안고 대상에 대한 (무)지(not-knowingness)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완전한 이해가능성이라는 주체화/종속화의 욕망을 저버린 채로 나는 나와 대상의 관계를 처음으로 시작하는, 말하자면 대상을 사랑해야하는 최초의 마주침을 구조화하는 이 임무를 계속한다. 나의 불완전성과 알려질 수 없는 대상의 모호성이 만나는 자리를 회복적 읽기가 책임지는 것이다.
(김)용선 작가의 개인전 《그는 거기에 없었다, 2024/09/19~10/02》는 5분 30초 분량의 슬라이드쇼 <그는 거기에 없었다>와 1678장의 인스턴트 필름을 달력의 형식으로 구조화해 전시벽에 붙인 설치 <탄생 비탄생 탄생: 인스턴트 필름 1678장 연작>, 한 시간 분량의 다큐 형식의 영상 <Figure of Family>로 구성되어 있다. 줄곧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사진, 텍스트, 영상을 갖고 만들어온 용선이 이번에 물고 늘어지는 이야기는 무엇보다 최근에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혹은 자신이 태어남과 연관된 이야기이다. 유독 아내에게 주폭이었던 남편을 피해 가출을 감행해 자신의 집 혹은 ‘대안 가족’을 만들어낸 어머니의 이야기는 용선이 따라가며 기록하고 있는 가족 이야기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번에 용선이 부분적으로/환유적으로 잘라내어서 구조화한 부분은 잔인한 남자였던 남편에 대한 보복으로 “이제 네 새끼를 낳나 봐라”라며 5살 터울의 형의 탄생 이후 임신한 아이들을 족족 죽여서 낳았던 어머니의 분노와 공격성의 여파-잔여물이다. 심한 입덧으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아이들을 어머니는 모두 거부했고, 둘째이자 막내인 용선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가 너무나 조용했기에, 입덧이라는 ‘부작용’도 일으키지 않은 채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의 형식이 필요할지 모르는 어머니의 서사는 용기, 욕망, 사랑에 대한 것으로 계속 용선의 관점에서 쓰여질 것이고, 용선은 왜 자신이 살 수 있었는지, 혹시 ‘그들’이 내게 생존법을 알려주어서는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후 상상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용선은 어머니의 선택으로 인해 비-선택된, “비-탄생”한 그들을 “우리”라고 부르길 자처하면서 그들을 “가족”으로 셈하는 자신의 설명서(세즈윅의 용어)를 만들어낸다. 글을 잘 쓰는 용선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기억,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의 자리, 부모의 불화로 홀로 남겨진 자신에 대해 쓴 글(소설, 에세이, 사진)을 묶은 책 『했었었었다』를 읽으며 나는 오열하고 폭소했는데, 상실과 부재에 대해, 그리고 그럼에도 그 안에서 작동하는 유머에 대해 작가가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있어서였다. 마모된 부분, 사라지는 부분, ‘전체’에 들어올 수 없는 파편들이 자전적 서사 안에서 온당하게 대우받고 있는 글이었다. 용선은 거의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하려는 읽기를 실천하고 있는 작가이고, 이번에 그가 대우하려는 슬픔과 상실은 태어나지 못하고 사라진 자신의 ‘형들’,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친형과 자신 사이의 허수/공집합, ‘미싱 링크’를 가시화하는 데 투여된다. 어머니의 생존과 연관해서 그들의 죽음은 필연이고 작가 김용선의 응시-하기와 연관해서 그들의 가시화는 필연적이다. 용선은 자신의 작업을 “부모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라고, 4인 가족의 이야기에서 배제된 이들을 우리로 불러들이고 “기억하는 건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쓴다. 그것이 “아버지처럼 되지 않는”,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지난 일을 생각하는 데 오늘을 쓰지 않는”,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용선은 아버지가 사준 카메라, 이번 전시를 위한 사진을 찍으면서 처음 꺼내든 카메라로 1678장의 즉석 사진을 찍었다. 하루하루를/만 살 듯이 매일 매일(의 차이)을 안과 밖에서 찍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반려견이 등장하고 서울과 청주를 오가며 눈에 띄는 것들을 막 찍은 것이고, 심지어 길을 물어보는 아저씨도 찍었다(알아볼 수 있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즉석 사진을 한 장씩 선물했다). 사진은 안과 밖,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서사와 파편의 위계 없이 무차별적으로 찍힌 것들의 묶음이다. 용선은 이 사진들, 주제도 의도도 없는 사진 1,678장을 갖고, 5살 터울의 형과 자신의 생년월일의 간극인 1,678일을 달력 형태로 배치했다. 형과 용선 사이에 있었을 지도 모르는 형제, 태어났을 수도 있는 타자를 대우하는 방식에는 은유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사이, 차이로서의 1,678일을 달력 형태로 배치하는 것, 그 사이-여백의 불가해성을 가시화하는 것 외에, 그 여백을 무차별적으로/평등하게/무감각하게(?) 찍은 사진으로 메우는 것 외에 듣고 상상하고 틈을 벌리고 더 큰 전체를 형상화하고 그럼으로써 ‘사랑하는’ 것 외에 용선에게 ‘할’ 게 없다. 슬라이드쇼 <그는 거기에 없었다>는 형이 태어난 날이 속한 해의 달력에서 용선의 생일이 속한 달력으로 끝난다. 붉은 동그라미가 가끔 달력에 등장하는 데, 어린 용선이 속한 4인 가족에게 중요한 날들이었을 것 같다. “나는 조용하게 태어났다, 어머니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이나 “가족만큼 선별적인 게 있을까”와 같은 문장이 사이를 메우거나 벌린다. 가족 사진첩에 있었을 것 같은 빛바랜 가족 사진들이 특수처리를 통해 ‘음화’처럼, 거의 알아볼 수 있는 기록으로 또 사이를 벌리면서 메운다. 이 쇼는 ‘비탄생’ 혹은 사라짐, 혹은 부재가 묻은, 우리를 놀래키는 “번뜩이는 섬광, 희미한 기억”이 도사린 일상에 대한 것이다. “그는 거기에 없었다”, 아니 ‘내가 아는 거기에 내가 아는 그는 이미 항상 없을 것이다’를 ‘거기에 있었던 그’로서 셈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사진 작가 용선의 방법은 이런 것이다. 한국의 아버지로 살다가 죽은 아버지(“제게 아버지란 이름은 실패한 남자들의 다른 이름입니다”)에 대한 작업을 했고, 계속 탈주하는 어머니에 대한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번에는 부재하는/사라진 형제를 기억하기 위해 태어난 자들을 흐리게 지우는 사진적 기법이 있었다.
1) Eve Kosofsky Sedgwick, “Paranoid Reading and Reparative Reading, or, You’re So Paranoid, You Probably Think This Essay Is About You,”, Touching Feeling, 2002, p.128.
2) 김희원, 「세즈윅이 벌랜트를 다시 읽는다면?: 반복, 형식, 시나리오의 가능성과 ‘느린 읽기’」, 『영학논집』, 2020, p.2.
3) 김용선, 『했었었었다』, 공공일공, 2021, p. 369.
양효실(비평)